Friday, December 2, 2011

'쿠데타의 정수'를 보여주는 정수장학회?

[변상욱의 기자수첩] 정수장학회와 부산일보를 말하다 ①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 경영진이 신문인쇄를 멈추고 노조는 돌리고… 이게 뭔 일? 

11월 30일자 <부산일보>가 발행되지 못했다. 부산일보 경영진이 윤전기를 세워버렸기 때문이다. 12월 1일자 부산일보는 정상 발행되었다. 경영진이 세운 윤전기를 기자들이 직접 돌려 신문을 찍어냈다. 

시작은 부산일보 노조가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보도 공정성의 토대와 부산일보의 발전을 위해 ‘신문사 지배구조의 개혁’을 요구하면서이다. 이에 대해 경영진은 노조위원장을 해고했다. 그러나 부산일보 편집국은 국장 이하 대다수 기자들이 부산일보 지배구조의 개혁이 옳다며 경영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내용을 신문에 보도해왔다. 결국 편집국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돼 대기발령으로 보직이 박탈됐다. 이 같은 내용들을 신문에 실으려 하자 경영진이 윤전기를 세웠고, 멈춘 윤전기를 기자들이 직접 돌리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부산일보 ‘지배구조 개혁’이라는 노조와 기자, 편집국 간부들의 요구 내용은 어떤 것일까? 40년 전 5.16 쿠데타 직후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 감옥에서 수갑 차고 자진(?) 재산 기부?… 소가 웃을 일

지금은 고인이 된 2대, 3대 국회의원을 지낸 삼화그룹(삼화고무) 김지태 회장은 5.16 쿠데타 당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부일장학회를 만들어 재산의 지역사회 환원을 실천하고 있었다. 5.16 혁명 다음 해 군사정권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김 회장의 재산을 내놓으라고 회유와 압박을 계속했고, 김 회장은 견디다 못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국가헌납을 기다리던 군사정권은 1962년 4월, 돌연 김 회장의 회사 임원 9명과 김 씨의 부인을 부정축재, 재산해외도피, 관세법 및 외환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수감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간경화 치료를 받다 황급히 귀국한 김 회장마저 김포공항에서 곧장 연행해 역시 구속수감했다. 그리고 군 검찰은 이들에게 곧바로 징역형을 구형했다. 

군사법원의 판결만을 남겨놓은 1962년 6월 말, 군사정권은 감옥에 있는 김지태 회장에게 ‘자신의 재산을 자진해 국가에 무상으로 기부할 것을 승낙하노라’는 기부 승낙서에도장을 찍으라 요구한다(도장을 받아낸 고원중 장군은 훗날 법무부 장관이 된다).

아내와 회사 임원들 10명이 감옥에 갇혀 판결을 기다리고 자신도 같은 신세고, 아들은 인감도장을 갖고 끌려와 있는 상황에서 망설이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힘들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우리 이거 없이도 살아요. 포기하세요.” 김 회장은 아들의 마지막 설득에 14년을 키운 부산일보 등 소유재산의 ‘자진무상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는다. 

흰 죄수복에 억울한 유죄판결을 앞두고 있고 두 손에 수갑을 찬 상황에서의 승낙이 ‘자진기부’일까? 법무부장관을 지낸 사람(고원중 장군)은 끝끝내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부 승낙서에 날인 한 날로부터 이틀 뒤 김 씨의 부인과 회사 임원들은 군 검찰의 공소취하로 석방됐다. 

우습게도 김 회장 부인이 다이아 반지를 밀수했다며 관세법 위반혐의로 잡아가고는 석방할 때는 끼고 나가라고 돌려 줬다고 한다. 결국 협박을 위해 잡아다 군 검찰이 징역형을 구형한 뒤 재판부 판결만 남겨 놓고 재산 쓸어오기 담판을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회사 임원들은 왜 죄다 잡혀 갔을까? 그건 회사와 재단의 지분이 임원들에게 두루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 회장 압박을 겸해 모두를 겁박하고 도장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부산일보 주식 100%, 부산MBC 주식 100%, 문화방송 주식 100%, 정말 싹쓸이의 종결자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그 후 드러난 바로는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에 대한 기부승낙서에 찍힌 인감도장이 서로 다르고 날짜나 주소조차도 틀리고, 도장 찍은 기억도 없는 사람의 도장도 찍혀 있는 등 풀어야 할 미스테리들이 많았다. 또 국방부에서 김 회장에게 배달된 감사공문은 실로 황당하다. 

“귀하와 이사진의 결의로 1962년 4월11일에 기부하신 땅은 소중히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땅은 장학 사업용으로 마련했던 토지이다. 1962년 4월11일은 김 회장이 일본 출장 중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어 인감도장을 행사할 수 없던 시점이다. 결국 종합해보면 중앙정보부가 부일장학회의 재산털기에 나서 관련자들의 인감이나 서류를 알아서 처리했고 마지막 단계에서 김 회장의 기부승낙서를 받아냈다는 정황이 그려진다. 

◇ 쿠데타의 정수를 보여주는 정수장학회? 

그러면 그 재산은 어디로 갔을까? 어차피 인감이나 서류를 마구 꾸며 빼앗을 거면서 기부승낙서는 왜 필요했을까?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 회장의 부일장학회를 눈여겨보면서 새로운 구상을 한다. 그래서 김 회장에게 헌납 받을 재산으로 장학재단을 만들라고 중앙정보부와 부산의 군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기부승낙서는 새로운 장학재단 설립에 필요한 서류였다. 감옥에서의 인감도장 날인 뒤 1주일 쯤 지나 <5.16 장학회>가 탄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5.16 장학회>, 훗날에 이르러 이름을 바꿔 박정희의 ‘정’, 육영수의 ‘수’ 를 딴 <정수 장학회>이다.(1982년). 

장학회 창립 이사에는 김연수 삼양사 회장(동아일보의 모기업), 이병철 삼성물산 회장(중앙일보의 모기업) 등이 참여했다. 정수장학회는 현재 서울 MBC 주식 30%, 부산일보 주식 100%를 갖고 있다. 이밖에 예금 185억원,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건물 터 723평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정수장학회를 거쳐 간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인연으로 박근혜 의원과 맺어진 수많은 인연들로 구축된 인적 네트워크로 지배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정수장학회를 어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근혜 의원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일까? 이 주제는 다음 주 월요일(12월5일)에 다시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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